
<신학논단>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무엇이 문제인가?
문제 제기―그리스도의 순종은 하나인가? 두 개인가?
최근에 개혁신학을 표방하는 신학자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강조하므로 많은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역사적으로 17세기 청교도 신학자인 존 오웬이 도입하였고, 개혁신학을 표방하는 19세기의 헤르만 바빙크, 20세기의 루이스 벌 코프, 21세기의 이남규 교수, 이승구 교수, 김재성 교수, 김병훈 교수, 김효남 교수 등에 의해 주장되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순종이 하나인데,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으로 나눈다. 그들은 능동적 순종을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 준수로 의를 획득한 후 그 의를 인간에게 전가시켜 준 후, 영생을 주는 것으로 이해하고, 수동적 순종을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작정에 따라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고 피 흘려 구원 사역을 이루고 죄 사함을 주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구분은 바른 이해가 아니다. 이는 두 가지면에서 구원론적 모순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2단계 구원론이 그리스도의 사역을 파편화하며, "죄 사함만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고, 율법 준수의 공로가 더해져야 구원이 완성된다"는 구원 도식을 형성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2단계 구원론이 십자가 보혈의 구속 완전성을 훼손하고 그리스도의 생애를 율법을 행하여 공로를 쌓는 행위언약의 모형으로 격하시킬 뿐 아니라 행위언약의 틀을 그리스도에게 적용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칭의의 근거를 율법의 공로에 두는 율법주의적 오류에 사로 잡히게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이 바르다고 주장하는 것은 신학적 근거에도 맞지 않고 신약성경의 근거에도 맞지 않는 것으로서 이성적 사변의 산물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능동적 순종이 어떤 점에서 문제가 되는지를 고찰하는 것은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개혁주의 신학자 중 일부 신학자들의 주장인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문제점을 성경에 기초하여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스도의 신인양성(Hypostatic Union) 문제―그리스도의 피조물 취급
첫째, 능동적 순종론자들은 그리스도를 율법 준수의 의무를 지닌 '단순한 피조물, 인간'으로 취급한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성육신을 통해 신성(Divinity)과 인성(Humanity)을 가진 분임에도 불구하고, 인성을 강조한 나머지 그리스도를 율법 아래 매인 일반적인 인간과 동일한 신분 및 의무 상황에 놓여 있었다고 전제한다.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아담이 실패한 율법완수의 의무를 그리스도라는 한 인간이 대신 율법의 모든 요구 조건을 완벽하게 준수해야만 했다는 것이다.
그들의 이런 주장은 아담이 율법에 불순종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한 것이고, 그리스도가 율법에 순종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것을 잘 못 이해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리스도를 율법 규율에 무조건 순응해야만 하는 ‘단순한 피조물적 인간’의 위치로 하향 평준화시킨다. 결국 그들은 아담이 실패한 율법을 반드시 그리스도가 준수했다고 주장한다.
본래 율법은 하나님이 피조물인 인간과의 관계에서 제정하고 제시한 인간 삶의 준칙이다. 이에 율법의 입법자요 수여자인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율법의 조항을 일일이 준수한다는 주장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지닌 신인 양성(Hypostatic Union)의 위격적 통일성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그리스도를 마치 율법의 요구에 사로잡혀 그것을 완수해 내지 못하면 안 되는 피조물적 의무자로 묘사함으로써, 그분의 온전한 하나님 되심과 주권적 영광을 훼손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심각한 기독론적 왜곡을 초래하고 있다.
그리고 복음서에 나타난 율법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보면 안식일 제도를 비롯한 율법의 참된 의미를 친히 해석하고 주관하시는 '주인'으로 선포하고 있다. 이런 사실은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막 2:27-28)에서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는 율법 아래 복종해야만 하는 피조물이 아니라, 율법을 제정하신 하나님과 동일한 본체이다. 그런데 그분이 율법 아래 오신 것은 율법에 매여 ‘의’를 획득하기 위함이 아니라,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율법의 요구인 죽음으로부터 구속하기 위해 성육신한 것이다. 따라서 그의 성육신은 자발적 비하(Humiliation)이자 은혜의 사건이다.
이런 사실은 "율법을 제정하신 이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약 4:12a)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갈 4:4-5)에서 알 수 있다.,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왜 오셨는지를 밝힌다. 그는 그리스도가 율법 아래 나신 것을 피조물로서 당연히 지켜야 할 의무 때문이 아니라, 구속 중보자로서 죄지은 자들에게 죄 값으로 죽으라는 율법의 요구인 죽음을 십자가에서 대신 성취하므로 인간을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속하기 위해 순종했다고 한다. 결국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이 일을 위해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율법의 의무에 묶인 피조물적 인간으로 전락시키는 것은 기독론적 본질을 훼손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의 모든 행위는 인성만의 독자적 행위가 아니라 신인성 통합의 사역(Theandric operation)인데, 그리스도를 율법의 의무에 묶인 피조물적 인간으로 전락시키는 것은 인성을 신성으로부터 분리해 독자적 행위 주체로 만드는 네스토리우스주의적(Nestorian) 우를 범할 수 있다.
칭의(Justification)의 근거 왜곡
둘째, 능동적 순종론자들은 그리스도가 율법 순종을 통해 '자신을 먼저 의롭게 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성육신한 후, 공생애 전체에 걸쳐 율법의 조항들을 일일이 준수하므로써 하나님 앞에서 율법적 ‘의’를 성취하시고, 이 율법 준수의 공로를 바탕으로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얻었다고 한다. 그들은 그 근거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3:15)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롬5:18-19, 외 갈4:4-5)를 제시한다.
그들은 마태복음 3:15절, 로마서 5:18-19절, 갈라다아서 4:4-5절에 기초하여 그리스도가 율법의 세부 조항을 하나하나 완수한 것으로 해석한다. 이는 그리스도가 사람으로 오셨기에 율법 순종이라는 과정을 통해 의롭다는 인정을 먼저 받아야만 비로소 타인을 위한 대속의 자격을 갖추게 된다는 논리이다. 하지만 이런 논리는 신학적으로 매우 위험한 재세례파적 기독론 오류 또는 소시니안적 기독론 오류에 가까운 것으로서 성경의 의미를 왜곡한 것이다.
그들의 주장대로 그리스도가 율법 준수로 의로워졌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이전에는 의롭지 못했거나 불완전했다는 오해를 불러 일으킨다. 그리스도는 의로워지기 위해율법을 지키신 것이 아니라, 이미 의로우신 분으로서 율법을 완성하려 오신 분이다. 따라서 율법을 준수하여 의롭게 됐다는 것은 부당한 해석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의로운 행위란 무슨 뜻인가? 그것은 그리스도가 본래 죄가 없고(요1서 3:5; 히 4:15) ‘의’ 자체(Essential Righteousness)인데, 그래서 스스로 의로워져야 할 필요가 전혀 없는데. 율법을 지켰다는 것은 자신을 죄인들과 동일시하고 율법이 죄인에게 요구하는 죽음을 십자가에서 대신 구현하므로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완벽하게 순종하여 그것을 완성했다는 뜻이다.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가 율법 준수로 의롭게 됨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본래적 거룩함과 무죄성(Impeccability)을 부정하는 일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율법 순종이 '자신을 의롭게 하기 위한 조건'이었다면, 그 순종은 타인을 위한 대속적 순종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행위'가 되어 버린다. 결국 이것은 그리스도의 모든 공생애의 삶과 순종이 오직 죄인인 우리를 위한 자발적이고 대속적인 사역이었다는 성경적 십자가 중심 교리를 근본적으로 흔드는 결과를 낳는다.
이런 점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가 인간들처럼 율법을 지켜서 비로소 의인이 된다는 것은 바른 주장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영원 세계에서부터 본질적으로 죄가 없고 의로운 분이시기에 그가 시간 세계에 오셔서 스스로 율법적 행위를 시도할 필요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은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눅 1:35)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요1서 3:5b)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이라"(히 7:26)에서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순종은 그리스도 자신의 ‘의’를 획득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영원부터 의로우신 분이 구속 중보자로서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복종하신 대속적 순종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스스로를 의롭게 하기 위해 율법을 지켰다는 주장은 성육신 이전부터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신격과 무죄성을 모독하는 것이다.
전가(Imputation)개념의 오용과 논리적 모순
셋째, 능동적 순종론자들은 그리스도가 율법 순종으로 획득한 ‘의’를 인간에 게 전가시켜 준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주장하는 능동적 순종 교리의 핵심은 ‘구원의 이분법적 구도’에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Passive Obedience)인 십자가의 죽음을 단순히 인간의 죄를 사하여 ‘무죄 상태(죄 형태의 제거)’로 만들 뿐이라고 하면서, 그것만으로는 영생을 얻을 수 없다고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생전에 능동적 순종인 율법을 완벽히 지켜서 획득한 '율법적 의(Active Obedience)'가 별도로 전가(Imputation)되어야만 인간이 비로소 하나님 앞에서 적극적인 의인으로 인정받고 영생을 얻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성경이 말하는 '십자가 구속의 완전성'을 심각하게 훼손한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과 십자가에서의 단번의 제사가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할 뿐만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의롭게 만드는 복음의 핵심이라고 선언한다.
그런데 율법 준수로 얻은 ‘의’와 십자가 피로 얻은 ‘의’를 인위적으로 분리하는 것은, 십자가의 사역을 '단순한 죄 사함' 정도로 축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반면에 십자가의 죽음은 그리스도의 전 생애에 걸친 순종의 절정이자 완성이며, 성경은 바로 이 십자가의 피와 죽으심을 통해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가 완전하게 전가된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강조하는 자들은 율법 이행이라는 공로적 개념을 구원의 필수 요소로 끌어들임으로써 십자가 공로의 유일성과 완전성을 반감시키는 것이 이 주장의 치명적인 문제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의’가 율법 준수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그의 피를 통해 직접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로마서 5:9절과 히브리서 10:10절에서 분명히 증언한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롬5:9)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10:10)
또한 그리스도가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다. 여기에 율법 순종이라는 별도의 ‘의’가 추가로 전가되어야 할 여지는 없다. 또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 자체가 완전한 ‘의’이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 가시니라" (요한19:30)
사도 바울은 율법 준수를 통한 ‘의’를 구원 요소로 결합하는 것을 단호히 배격하며,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는 비결은 오직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흘린 그의 피를 믿을 때 가능함을 강조한다.
이런 사실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2:16).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고전1:30)에서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이 죄 사함과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가 율법의 조항을 조목조목 지켜 쌓으신 공로적 ‘의’를 넘겨받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므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완벽히 화목하게 하신 '구속 중보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인간이 믿음으로 그분과 연합할 때 거저 주어지는 것이다.
결론적 고찰―그리스도의 순종은 하나(Christ’s obedience is undivided)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교리는 표면적으로 그리스도의 생애를 높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실상은 성경이 말하는 기독론과 구원론을 심각하게 왜곡시키고 있다. 즉 그들이 능동적 순종교리를 통해 그리스도의 생애와 순종을 다각도로 조명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했을지라도, 능동적 순종교리는 그리스도의 순종을 두 개로 나누므로 성경의 핵심 구속론과 기독론을 심각하게 왜곡시키고 있다.
첫째, 기독론적 왜곡이다. 창조주시고 율법의 입법자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율법 준수의 의무를 지닌 피조물의 위치로 낮춤으로써,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성과 구속주로서의 자발적 주권을 훼손하고 있다.
둘째, 십자가 구속의 완전성 훼손이다. 그리스도의 순종을 '생전의 율법 순종(능동)'과 '십자가의 죽음(수동)'으로 이분법적으로 분리하여, 십자가의 피 흘리심을 단순한 '죄 사함의 소극적 효과'로 제한하고 율법 순종을 통해 비로소 '적극적 의'가 완성된다고 주장함으로써 십자가 사역의 완결성을 약화시킨다.
셋째, 구원론적 공로주의의 위험성을 갖고 있다. 칭의의 기초를 그리스도의 단번의 대속 제사(십자가)가 아닌, '율법의 행위'라는 틀 안에서 찾으려 함으로써 바울이 그토록 경계했던 율법주의적 구원관의 문제를 다시 불러올 위험을 안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복음의 핵심은 명확하다. 그 내용은 그리스도가 율법에 매인 자들을 속량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모든 율법의 요구와 저주를 몸소 담당하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가 율법을 일일이 준수한 것이 아니고 율법이 죄인에게 요구하는 죽음을 인간 대신 십자가에서 단번에 죽으심으로 우리 인간을 향한 죄 사함과 의롭게 됨의 은총을 우리 인간에게 선물로 주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율법의 공로를 전가 받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모든 구속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와 연합함으로써 죄를 사함 받고 의롭게 되는 은혜를 동시에 받아 누리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분 안에서 하나님과 의로운 관계를 입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완전한 십자가의 복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능동적 순종론이 가진 신학적 오류를 바로잡는 성경적 해법임을 알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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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낙범 박사
중앙대학교 철학과 졸업(B.A)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및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졸업(Th.M)
숭실대학교 대학원 졸업(Th.M)
Graduate School of Kernel University 대학원 졸업(U.S.A: 조직신학박사,Th.D)
총신 조직신학 교수, WATS 석좌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