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처럼 무더위가 계속되면 내 어릴 적 여름날이 떠오른다. 숨이 턱턱 막히는 더위와 함께 굵은 땀방울이 맺히던 고된 농사일들이 눈앞에 선하게 그려진다. 초중학교를 거치며 겪었던 그 시절의 여름은 단순한 계절이 아니라, 삶의 무게를 온몸으로 배우며 훌쩍 자라나던 거대한 통과의례와도 같았다. 그중에서도 아리게 기억하는, 일 년 중 가장 뜨거웠던 보리 베기와 담배 농사의 풍경을 가만히 꺼내어 본다.
일 년 중 가장 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쯤이면 어김없이 보리 베기 작업이 시작되곤 했다. 찌는 듯한 열기 속에서 낫을 들고 베기를 시작하자마자 이마에서는 비 오듯 땀이 흘러내렸다. 가장 괴로운 것은 비처럼 흐르는 땀과 보리의 억센 까끄라기였다. 땀에 젖은 피부에 까끄라기가 쉴 새 없이 달라붙으면, 그 가려움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참아내기 힘들었다. 게다가 태풍이나 비바람에 제멋대로 드러누워 엉킨 보리 밭을 만나면 작업 능률은 바닥을 치고 허리는 끊어질 듯 아파 왔다. 눈을 들어 앞을 보면 끝이 보이지 않는 보리밭 수평선은 아득하기만 했다.
하지만 낫으로 베는 것으로 모든 과정이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베어낸 보리를 단단히 묶어 집 마당으로 옮겨야 했고, 마침내 탈곡기로 타작하는 날이 오면 마당은 온통 시끌벅적한 전쟁터가 되었다. 드르릉드르릉, 덜컹덜컹 탈곡기가 내지르는 요란한 소음 속에서는 옆 사람과 대화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무슨 말을 하려면 목청껏 고함을 질러야 겨우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겨우 탈곡을 마쳐도 끝이 아니라서, 소중한 알곡을 얻으려면 마당에 서서 바람이 불어주기를 기다려야 했다. 바람이 부는 방향에 맞춰 키질하듯 보릿대와 까끄라기, 껍질을 날려 보내고 알곡만을 골라내어 가마니에 담아야 비로소 긴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보리 베기 못지않게 고된 일은 바로 숨 가쁘게 이어지던 한여름의 담배 농사였다. 무더위 속에서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나는 담배는 그만큼 손이 많이 가는 작물이었다. 특히 담배가 한참 자랄 무렵이면 어김없이 진딧물이 기성을 부렸다. 그 시절 무거운 분무기 농약 통을 짊어지고 담배밭 고랑 사이를 누비며 농약을 살포해야 했다. 내 키보다 훨씬 높이 자란 담배밭 속은 꽉 찬 잎들 때문에 바람 한 점 통하지 않는 거대한 온실 같았다. 살충제의 독성 때문에 아무리 덥고 숨이 막혀도 입과 코를 반드시 막아야 했지만, 그때는 마스크라는 이름조차 생소하던 시절이었다.
비 오듯 흐르는 땀을 닦을 새도 없이, 두꺼운 수건으로 입과 코를 꽁꽁 틀어막은 채 농약을 분사했다. 왼손은 쉴 새 없이 분무기 손잡이를 아래위로 움직여 압력을 유지해야 했다. 날은 찌는 듯이 덥고, 사방은 막혀 바람은 한 점도 불지 않고, 입은 수건으로 막혀 숨은 가쁜데, 진딧물과 끈적끈적한 담배 잎의 수액이 온몸에 엉겨 붙어 피부는 참을 수 없이 가려웠다. 그야말로 이중삼중의 고통 속에서 눈물겹게 하루를 버텨내야 했다.
고된 농사일은 해가 져도 결코 끝이 나지 않았다. 담배 나무 아랫부분의 잎들이 노릿 노릿하게 익어가면, 우리는 그 잎들을 하나둘 정성껏 따서 바지게에 가득 짊어지고 집으로 나르곤 했다. 어둠이 내린 마당에는 호롱불이 희미하게 밝혀지고, 모기들의 극성을 막기 위해 모깃불이 피어올라 쌉싸래한 연기가 정겹게 퍼져 나갔다. 그 불빛 아래 온 가족이 둘러앉아 늦은 밤까지 담뱃잎을 엮으며 서로의 고단함을 달래곤 했다.
집 처마 밑 그늘에 주렁주렁 매달아 바짝 말리는 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잎이 마르고 나면 다시 정성껏 키를 맞춰 꼭지를 만들고, 비로소 출하를 마쳐야 비로소 모든 긴장이 풀렸다.
그 시절의 여름은 뜨겁고, 가렵고,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고생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해 질 무렵 모깃불 연기 속에서 가족이 함께 땀을 닦아내던 그 아스라한 풍경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마음 한구석을 뭉클하고 따뜻하게 적시는 가장 진한 여름날의 추억으로 남아 있다.
[문용대]
한국수필 수필문학상 수상
문학고을 소설문학상 수상
지필문학 창립10주년기념 수필부문 대상 수상
코스미안뉴스, 브레이크뉴스 고정 필진
한국예인문학, 지필문학, 대한문학, 각종 문학카페 활동
대한문학 부회장, 지필문학 이사
수필집 ‘날개 작은 새도 높이 날 수 있다’, ‘영원을 향한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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