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은 사악한 동물이다. 법이 없다면 아마 인간은 멸종했을지 모른다. 그 사악함 때문에 그 이기심 때문에 그 욕심 때문에 인간은 진작 지구에서 사라졌을지 모른다. 법이 촘촘하게 우리는 보호하고 있는 지금도 인간의 사악함은 곳곳에서 드러난다. 부산에서 돌려차기로 여성을 죽일 듯이 팬 사건도, 힘없는 아이들을 죽인 사건도, 또 가족을 죽인 사건도 하루가 멀다고 신문을 도배하는 사건들이 일어난다. 그러니 이 지구에서 인간만큼 사악하고 잔인한 동물은 없을 듯하다.
법은 존재하지만, 그 법의 보호를 받는 것은 어렵고도 또 어렵다. 돈 많고 뒷배가 있고 권력이 있는 사람들만 법의 보호망에서 웃고 있다. 참 더러운 세상이다. 이젠 변호사 살 돈이 없으면 그냥 이 세상 하직하는 것이 더 나을지 모른다. 이런 불평등의 세상에 화가 나고 고통스러운데 1963년 6월 미국 미시시피 델타에서 인종차별로 죽은 한 흑인 남성의 사건이 30여 년이 지나고 나서 제대로 법의 심판대에 올라 정의를 심판하게 된다. 이 실화 사건을 영화로 만든 것이 ‘미시시피의 유령’이다.
역시 미국이다. 미국은 법치주의가 살아있었다. 미국의 자존심, 미국의 정신이 법치주의 위에서 꽃핀다. 정의는 누구에게나 공정해야 한다. 우리나라처럼 법 위에 앉아 세 치 혀로 법을 농락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그런 정의가 부럽다. 우리나라나 미국이나 죽어야 할 놈은 절대로 죽지 않는다. 비굴하게 거짓말하고 법망을 요리조리 피해 나간다. 상식은 죽고 정의는 실종된 그런 사회에서 사법 신뢰도는 땅에 처박히고 믿을 놈 없는 세상이 되어간다. 그래서 슬프다. 영화 ‘미시시피의 유령’을 보면서 정신적 위안을 얻으며 그 속으로 들어가 보자.
1963년 미국 미시시피주. 흑인 인권운동의 지도자이자 전국유색인지위향상협회(NAACP) 미시시피 지부장이던 메드거 에버스는 자신의 집 앞에서 백인우월주의자의 총탄에 쓰러진다. 그의 죽음은 미국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겼지만, 얼마 뒤 범인인 바이런 드 라 벡위드는 곧바로 재판이 열리는데 그는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환영을 받으며 영웅으로 추앙받고 피해자의 부인 멀리 에버스는 끝없는 모멸과 불공정을 감내해야 했다. 법정에서 전 주지사가 범인인 벡위드와 악수하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멀리 에버스는 똑똑하게 기억해 둔다. 그렇게 두 차례 재판에서도 배심원단의 의견 불일치로 처벌받지 않는다.
1989년 10월, 에버스의 죽음 이후 26년이 흐른 뒤 묻혀 있던 사건이 멀리 에버스의 재기소로 수면 위로 다시 올라온다. 남부 주류 사회에 속한 검사 바비 딜라터는 어쩔 수 없이 이 사건을 맡게 된다. 이 부담스러운 사건을 하나하나 파헤쳐 가면서 불합리와 불공정을 겪게 된다. 정의가 실종된 미국 주류 사회에 대한 자괴감을 느끼지만 정의에는 시효가 없다는 믿음 하나로 새로운 증거들을 찾아내 간다. 차츰 이 사건에 대해 오랜 세월 침묵하고 외면했던 사람들의 입이 열리고 묻혀 있던 진실이 하나둘 그 뿌리가 드러나게 된다.
그러나 사건을 다시 수면 위로 끌어 올리는 과정은 쉽지 않다. 지역 사회의 뿌리 깊은 인종차별과 정치적 압력, 그리고 과거를 덮으려는 세력들이 그의 앞을 가로막는다. 그 와중에 바비의 부인은 이 사건을 파헤치는 것이 못마땅해하더니 이혼을 해버리고 만다. 바비는 싸우다 다친 아들 치료를 위해 병원을 방문하고 거기서 지혜로운 의사를 만나 재혼한다. 그녀의 진심 어린 조력을 받아 이 사건에 더 몰두하며 끈질기게 증인을 찾아내고 증거를 확보해서 재판을 준비해 나갔다.
마침내 다시 열린 재판에서 오랜 세월 법망을 피해 살아온 벡위드는 유죄 판결을 받는다. 메드거 에버스가 세상을 떠난 지 30여 년 만에 비로소 법은 늦은 정의를 실현한다. 아직도 정신 차리지 못한 벡위드는 종신형을 받은 뒤 항소를 하지만 대법원은 유죄 판결을 그대로 유지했고 복역 중 2001년에 교도소에서 쓸쓸하게 죽고 만다. 멀리 에버스는 사람들 앞에 당당하게 말한다.
“참으로 오랜 여정이었어요. 여보 제가 완주했어요. 지금 하고 싶은 말은 만세 메거드 뿐이에요. 메거드 만세”
‘미시시피의 유령’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사회가 법과 양심을 회복해 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정의는 늦을 수는 있어도 결코 사라질 수는 없는 법이다. 그 정의를 회복한 미국의 법치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사법 신뢰도가 높은 미국이니까 가능한 일일까. 우리나라에서도 이 정의는 실현될 수 있을까. 그놈의 검둥이타령, 흰둥이타령, 노랭이타령을 언제쯤이면 졸업할까. 검둥이는 죽여도 된다는 백인들의 어이없는 우월감, 모두가 범인을 알고 있으면서도 침묵했던 사람들, 그들을 향해 총을 쏜 사람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 총성을 외면한 사회였다는 사실이 슬프다.
[최민]
까칠하지만 따뜻한 휴머니스트로
영화를 통해 청춘을 위로받으면서
칼럼니스트와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대학에서는 경제학을 공부하고
플로리스트로 꽃의 경제를 실현하다가
밥벌이로 말단 공무원이 되었다.
이메일 : minchoe293@g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