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릴 적 여름방학을 돌이켜보면 늘 비슷한 기억이 떠오른다. 방학 첫날 눈을 떴을 때는 한 달이라는 시간이 까마득하게 길어 보였지만,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개학 전날이 되어 밤새 일기장을 채우느라 애를 먹곤 했다. 그 시절에도 방학은 늘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끝날 때쯤엔 참 아쉬웠다. 하지만 그때 느꼈던 '금방'과, 어른이 된 지금 우리가 느끼는 '눈 깜짝할 새'는 결코 같은 의미가 아니다.
어릴 적 방학이 빠르게 지나갔던 이유는 매일매일이 즐거움으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온몸에 땀을 흘리며 해 질 녘까지 뛰놀던 순간, 매일이 새로운 놀이였고 매 순간이 눈부신 기억으로 남았던 '밀도 높은 몰입'의 결과였다. 그런데 어른이 된 지금의 시간은 왜 이렇게 속절없이 빠른 걸까. 흔히 인생의 속도를 나이에 비유해 20대엔 시속 20km, 40대엔 40km, 60대엔 60km로 달린다고들 한다. 이 이야기가 서글프게 다가오는 이유는, 지금의 속도감엔 어릴 적 느꼈던 설렘이나 몰입 대신 '무감각함'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월요일 아침 멍하니 커피 한 잔을 내리며 숨을 돌린 것 같은데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금요일 밤이고, 새해 다짐을 적었던 메모지 위에 먼지가 쌓이기도 전에 한 해의 절반이 훌쩍 지나간다. 어릴 적 방학은 신나게 노느라 시간이 '흘러간' 것이라면, 지금의 시간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증발해' 버리는 것에 가깝다.
심리학자들은 이 현상을 '새로움의 부재'로 설명한다. 어릴 때는 세상의 모든 것이 낯설고 신선했다. 길가에 구르는 단풍잎 하나, 처음 타보는 자전거의 페달 느낌, 낯선 시골 외갓집의 밤하늘까지. 뇌는 이 수많은 새로운 정보들을 감탄하며 기록하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기억의 데이터가 촘촘하게 채워지다 보니, 돌이켜보았을 때 그 시절은 하루하루가 선명한 풍경화처럼 남아있는 것이다.
반면 어른이 된 우리의 일상은 어떠한가.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풍경과 감정에 익숙해져 있다. 쏟아지는 졸음을 참으며 지옥철이나 막히는 도로 위에 몸을 실어 출근하고, 모니터 화면 속 쏟아지는 업무를 쳐내다 보면 어느새 해가 진다. 늘 다니던 길로 퇴근해 무거운 몸을 누이는 반복되는 일상. 뇌는 효율성을 위해 이 익숙한 하루를 '자동 항해 모드'로 지나쳐 버린다. 굳이 기억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시간들이 뭉텅이로 생략되면서, 우리 기억 속에 남아있는 순간 자체가 빈약해지는 것이다. 결국 그 텅 빈 공간만큼 시간이 압축되어 덧없이 지나간 것처럼 느껴진다.
결국 지금의 시간이 너무 빠르게 간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하루하루를 그만큼 감흥 없이 지나쳐 보내고 있다는 서글픈 방증일지도 모른다. 어릴 적 방학처럼 매 순간을 생생하게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익숙함이라는 편안함에 안주해 삶의 '자동 재생' 버튼을 눌러놓은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시간의 흐름을 멈출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하지만 그 무감각한 속도감을 줄이고 내 삶의 밀도를 다시 높일 수 있는 열쇠는 여전히 우리가 쥐고 있다. 익숙함으로 채워진 일상에 작고 새로운 순간들을 가만히 보태어줄 때, 쏜살같이 달아나던 시간도 비로소 천천히 제 숨을 고르기 시작한다.
오늘 하루, 당신의 시간은 어떤 속도로 흘러갔는가? 만약 오늘 하루가 형체도 없이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다면, 지금 이 순간만큼은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깊은 숨을 내쉬어보자.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자. 속절없이 빠져나가는 시간의 발걸음을 멈춰 세우는 유일한 방법은, 어릴 적 방학날처럼 눈앞에 있는 '오늘'이라는 순간을 온전히 느끼고 아껴주는 것뿐이다.
[심선보]
칼럼니스트
머니파이 대표
금융투자 강사
월간 시사문단 신인상 시부문 작가 등단
저서:‘마음이 머물다 간 자리’, ‘초보를 위한 NPL 투자 가이드’
메일 : ssonbo@nate.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