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큰 틀에서 보면 우리는 우주에서 잠시 빌려온 물질의 한 형태일 뿐이다. 별에서 만들어진 원소들이 지구로 와서 흙이 되고 물이 되고 식물이 되고 동물이 되었으며, 그것들이 다시 인간의 몸을 이루었다. 인간은 우주와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우주의 물질이 잠시 인간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이다. 인간은 태초부터 자연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추위를 막기 위해 옷을 만들고, 동굴을 집으로 바꾸고, 머리카락을 자르고, 피부에 문신을 새기고, 몸에 장신구를 달았다. 자연 그대로의 인간에 문명이 더해지면서 인간의 몸과 외형은 끊임없이 변화해 왔다.
인간은 자신의 물질적 몸을 끊임없이 재구성하며 살아가는 존재다. 자연미인이 자연이 만들어낸 얼굴이라면, 성형미인은 자연과 인간의 의지가 함께 만든 얼굴이다. 자연이 인간에게 기본적인 얼굴을 주었다면 인간은 거기에 자신의 의지와 기술을 더했다. 자연이 만든 얼굴에서 인간이 다시 얼굴을 설계하는 시대. 이것을 아주 긴 시간의 흐름에서 바라본다면, 성형은 인간이 자신의 신체에 개입하기 시작한 또 하나의 진화적 현상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함정이 있다. 성형은 진화와 다르다. 생물학적 진화는 유전과 자연선택 등을 통해 집단의 형질이 세대를 거쳐 변화하는 과정이다. 한 사람이 쌍꺼풀 수술을 했다고 해서 인류가 진화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이 기술을 이용해 자신의 몸과 외모를 의도적으로 변화시키고, 그 변화가 사회의 문화와 미적 기준을 바꾸어 놓는다는 의미에서는 성형을 '문화적 진화'의 한 단면으로 바라볼 수 있다.
실제로 인간은 이제 자연선택만으로 자신의 모습을 바꾸지 않는다. 안경으로 시력을 보완하고, 치아를 교정하고, 의수와 의족으로 신체 기능을 회복하며, 인공관절과 각종 의료기술로 몸의 한계를 넘어선다. 앞으로는 인공지능과 생명공학, 유전자 기술까지 인간의 신체와 능력에 개입할 가능성이 커진다. 그렇다면 미래의 인간은 자연이 만든 인간인가, 인간이 다시 만든 인간인가. 경계는 점점 흐려질 것이다.
그러나 성형의 진짜 문제는 얼굴을 바꾸는 행위가 아니다. 왜 바꾸고 싶은가에 있다. 자신의 개성을 더 아름답게 표현하기 위해서라면 자기결정의 문제일 수 있다. 하지만 사회가 요구하는 하나의 얼굴에 자신을 억지로 맞추기 위해서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모두가 같은 눈, 같은 코, 같은 얼굴선을 원한다면 인간은 자연의 다양성을 버리고 획일적인 아름다움이라는 새로운 자연을 만들어내는 셈이다. 자연은 다양성을 통해 아름다움을 만들었는데, 인간은 획일성을 통해 아름다움을 만들려고 한다.
아름다움의 본질은 완벽함이 아니라 다름에 있다. 욕심 많은 사람의 얼굴에는 욕심이 보이고, 따뜻한 사람의 얼굴에는 따뜻함이 보이듯, 한 인간의 역사가 기록된 얼굴은 자연 그 자체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면서 자연을 다시 변화시키는 존재다. 성형은 인간이 자기 몸을 선택하기 시작한 사건이며 자신의 몸을 바라보는 방식이 변화해 온 기록이다. 먼 훗날 인류가 지금의 우리를 바라볼 때는 이것 역시 인간 진화의 한 문화적 단계로 기록될지도 모른다.
“자연은 인간을 만들었고, 인간은 이제 인간을 다시 만들고 있다.”
[전명희]
서울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다 그만두고
‘밖철학연구소’를 설립해 연구에 몰두했지만
철학 없는 철학이 진정한 철학임을 깨달아
자유로운 떠돌이 여행자가 된 무소유이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