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하지의 영화 리터러시] 내 마음을 좀 알아줘

-마이크 리의 <내 말 좀 들어줘>리뷰



내 말 좀 들어줘01


마이크 리의 칸 황금종려상 수상작 <비밀과 거짓말(1996)>에서 호튼스는 자신의 친모를 찾아 나선다. 친모인 백인 여성 신시아는 젊은 시절 낳아 입양 보낸 흑인 딸의 존재를 숨긴 채 살아왔고, 그 비밀은 그녀의 불안과 낮은 자존감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로 작동한다. 호튼스와 신시아의 관계는 오랫동안 은폐된 채 유지되다가 영화 말미의 가족 식사 장면에서 폭로되고, 그 폭로는 파국이 아니라 이 가족이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게 되는 계기로 기능한다.


내 말 좀 들어줘02

그로부터 28년이 흐른 뒤, 호튼스를 연기했던 매리앤 장 밥티스트는 마이크 리의 최신작 <내 말 좀 들어줘>에서 전혀 다른 형태의 고립을 체현하는 인물, 팬지로 돌아온다. 팬지는 불평과 분노, 독설로 일상을 채우는 중년 여성이다. 그녀는 가구점 점원, 치위생사, 주차하기 위해 차를 뺄 건지 물어오는 낯선 이에게까지 적의를 드러낸다. 이 인물의 분노는 특정 사건에 기인하기보다, 오랜 시간 내부에 축적된 상처가 외부 세계와 만나는 방식에 가깝다. 마이크 리는 이를 과장이나 설명 없이, 특유의 리얼리즘 연출로, 반복적으로 제시한다.

<비밀과 거짓말>에서 신시아의 오빠 모리스의 가족이 서사의 균형추 구실을 했다면, <내 말 좀 들어줘>에서는 팬지의 여동생 샹텔의 가족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미용실을 운영하는 샹텔은 남편 없이 두 딸을 키우지만, 이 가족에게는 웃음과 수다, 신체적 친밀감이 자연스럽게 흐른다. 반면 팬지의 가족은 남편 커틀리와 아들 모지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팬지가 늘어놓는 폭언과 비난 속에서 입을 다문 채 살아간다. 팬지의 집이 식물과 동물을 극도로 배제한 채 청결을 이유로 거의 비워진 흰색의 빌라라면, 샹텔의 집은 화분과 색채가 넘쳐나는, 이케아 카탈로그를 연상시키는 공간이다.  

묵묵한 두 남자 사이에서 불만을 쏟아내는 팬지와, 끊임없는 수다와 배려로 끈끈한 유대를 형성한 샹텔 모녀 사이에는 팬지가 좀처럼 다가설 수 없는 정서적 괴리감이 놓여 있다. 이 간극은 어머니의 날에 초대되어 자리를 함께하게 되는 장면에서, 늘 말을 쏟아내던 팬지가 오히려 입을 다무는 역설적인 광경으로 드러난다. 먹지 않는 선택, 시선을 피하는 자세는 그녀가 이 관계 속으로 완전히 진입하지 못하고 있음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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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식사 장면은 영화의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다. 끊임없이 소통을 시도하는 샹텔과 두 딸의 태도에, 팬지는 침묵과 어색한 웃음, 끝내 터져 나오는 울음으로 맞선다. 

미장센 차원에서 보면, 이 장면은 음울한 팬지 가족과 활발한 샹텔 가족을 한 화면에 병치한다. 초대받은 팬지 가족은 식탁에 앉아 각자의 접시를 마주하고 음식을 먹고 있다. 음식을 거부한 팬지는 같은 식탁에 앉아 있으면서도 몸을 옆으로 틀어 공동체로부터 미묘하게 이탈해 있다. 샹텔의 두 딸은 샴페인 잔을 들고 자유롭게 공간을 오가고, 부엌에 앉을 자리가 없는 샹텔은 거실과 연결된 소파 팔걸이에 걸터앉아 있다. 샹텔과 두 딸의 시선이 서로를 향하는 동안, 팬지의 남편 커틀리는 접시를 바라보고, 아들 모지스는 베란다 쪽을 응시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 앉은 팬지는 그 어디에도 시선을 두지 않는다. <비밀과 거짓말>에서 큼직한 식탁을 사이에 두고 두 가족이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던 클라이맥스와는 분명히 대조되는 장면이다. 영화의 포스터에도 사용된 이 이미지는, 화목한 샹텔 가족과 팬지의 폭언 앞에서 음식만을 먹으며 견뎌야 하는 팬지 가족 사이에 놓인 팬지를 보여준다. 이 순간은 타인의 친밀함을 감당하지 못하는 팬지의 심리적 한계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지점이다. 소통을 갈망하면서도 동시에 두려워하는 팬지의 내적 모순은 이 침묵 속에서 또렷이 형상화된다.

팬지의 침묵은 바로 앞 장면인 어머니의 묘소를 찾아간 장면에서부터 연결된 것이다. 묘지에서 나눈 자매의 대화를 통해 유추할 수 있듯, 팬지의 현재는 어머니의 죽음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어머니의 노골적인 동생 편애, 어머니의 시신을 발견한 기억, 그리고 이후 어린 나이에 동생을 돌봐야 했던 삶은 복합적으로 지금의 그녀를 형성한다. 아버지의 부재로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집을 비웠고, 팬지는 바깥에서 친구들과 어울릴 기회를 잃은 채 소심한 아이로 자랐다. 수학적 재능을 인정받고 싶어 했던 내성적인 아이에게 어머니는 세상과의 유일한 통로였다. 그 어머니의 죽음을 목격한 순간, 팬지는 세상과 단절된다. 이후 팬지가 선택한 결혼은 사랑의 결실이라기보다, 고독과 단절을 피하기 위한 생존 전략에 가깝다. 남편 커틀리는 동반자적 관계를 원했을지 모르나, 팬지는 끝내 그 위치에 도달하지 못한다. 이 불안정한 관계는 무조건적인 사랑이 요구되는 자식에게까지 이어진다. 팬지는 아들 모지스에게 자신이 받고 싶었던 어머니의 인정을 끝내 건네지 못한다.

모지스는 어머니의 폭언 아래에서 위축된 삶을 살아왔다. 어머니의 날을 맞아 준비한 꽃다발은 일반적인 모자 관계를 회복하려는 시도이지만, 팬지에게 꽃은 벌레와 새를 불러오는 불결한 존재다. 그녀가 묘지 장면에서 샹텔이 준비한 꽃다발을 거부하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살아 있는 것에 대한 혐오는 어머니의 죽음을 목격한 기억과 맞닿아 있으며, 청결하지 못한 것은 생물에서 기인한다는 인식으로 굳어진다. 모지스의 꽃다발은 팬지에게 자식의 선의와, 인정받지 못한 자기 삶에 대한 애한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그녀는 꽃다발의 꽃을 손대지 않은 채 유리컵에 꽂는 데 성공하지만, 남편 커틀리는 그 꽃을 곧바로 정원에 버린다. 커틀리는 이 집에서 어떤 변화나 희망도 팬지의 냉소로 귀결될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서로의 말해지지 못한 상처는 완전한 정지 상태로 고착된다. 이는 커틀리가 작업 중 허리를 다쳐 2층 침실에 있는 팬지에 도움을 요청하지만, 그녀가 끝내 내려오지 않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내 말 좀 들어줘04


영화의 첫 장면이 남편 커틀리 밑에서 일하는 버질이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 장면으로 시작했다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버질이 자전거를 밴에서 꺼내 퇴근하는 모습으로 끝난다. 이 장면들과 이어진 장면이 팬지가 잠에서 깨어나는 장면인데 두 장면 다 악몽을 꾸다가 갑자기 깬 모습이다. 팬지의 삶은 그녀가 꾸고 있는 악몽 같은 것으로 그 누구와도 소통하거나 공감하지 못한 고독한 것이다. 

마이크 리는 정해진 시나리오 없이 배우들과 협력해서 캐릭터를 만들고 영화 속 배역이 아는 것만 정보를 주어 다른 배우들과 단절시키는 기법을 사용한다. 그래서 배우들은 자신의 역할에만 충실하게 되고 갑자기 닥친 상황에 놀라게 된다. 마이크 리의 연출 방식이 가장 빛을 발하는 영화가 바로 이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결국 <비밀과 거짓말>이 진실의 발화가 관계를 재구성을 가능하게 했던 영화라면, <내 말 좀 들어줘>는 그 이전 단계에서 이미 좌절된 인간의 모습을 응시한다. 이 영화에서 진실은 말해지지 않아서가 아니라, 말해질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에 고통스럽다. 팬지의 분노는 소통의 실패가 아니라, 소통 자체를 감당할 수 없게 된 심리의 형태다. 그래서 그녀의 말은 언제나 상대에게 도달하지 못하고, 관계는 회복이 아닌 정지 상태로 굳어진다. 마이크 리는 더 이상 “말하면 괜찮아질 수 있다”라는 희망을 쉽게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말 이전에 이미 너무 많은 것이 무너져버린 인간의 얼굴을 끝까지 바라본다. 그 응시는 냉혹하지만 무책임하지 않다. 이해받지 못한 삶이 어떻게 타인에게 상처로 되돌아오는지를 보여주는 이 영화는, 연민을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연민을 포기하지 않는 드문 성취에 도달한다. 굳어버린 정지 상태의 관계를 돌이킬 수 있는 건 동생 샹텔이 보여준 지치지 않고 이해하려는 시도와 끊임없는 사랑인 것이다. 





K People Focus 모하지 칼럼니스트 (mossisle@gmail.com)


영화와 음악을 사랑하며 아이들에게 독서와 글쓰기를 가르치는 희망의 칼럼니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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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026.01.06 13:17 수정 2026.01.06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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