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계봉의 산정천리] 은빛 파도 일렁이는 정선 민둥산

여계봉 선임기자

 

가을빛을 잔뜩 머금은 화려한 단풍산도 좋지만 능선을 따라 흐드러지게 핀 은백색의 억새 역시 가슴을 설레게 하기는 마찬가지다. 화창한 가을 햇살과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은빛 파도처럼 일렁이는 새하얀 억새가 바람에 하늘거리며 서걱서걱 울어대는 소리는 가을 여행의 색다른 묘미를 안겨준다.

 

국내 5대 억새 산행지 중 하나인 정선 민둥산의 억새밭은 50여 년 전 불을 놓아 만든 화전이었다. 불을 놓아 초목을 없애고 곡괭이로 땅을 일궈 배추와 무를 심던 수십만 평의 능선은 화전민들이 떠나자 여름에는 푸른 초지, 가을에는 은빛 물결로 장관을 이룬다. 이곳에서는 11월 15일까지 민둥산 억새꽃 축제가 펼쳐진다. 들머리인 증산초교 입구 주차장에는 평일인데도 등산객들이 타고 온 차량으로 가득하다. 기차역도 증산역에서 민둥산역으로 개명될 정도이니 정선 골짜기의 산간오지가 산 하나로 인해 졸지에 전국적인 명소가 된 셈이다. 

 

 민둥산에 오르면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억새의 은빛 물결이 장관을 이룬다.

 

대부분의 등산객들은 증산초등학교에서 출발하는 비교적 완경사의 1코스로 오른다. 하지만 오늘은 증산초등학교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능전마을에서 출발하는 2코스로 오르기로 하는데, 산행 거리는 6km 정도로 왕복 3시간 정도 소요된다. 2코스로 오르는 길은 적당한 비탈을 따라 서서히 고도를 끌어올리는 숲길이다. 산으로 올라가는 산길은 어느새 물기를 잃고 말라가는 풀들이 발길에 제법 사그락사그락 대며 무언가 준비할 시간이 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참나무 이파리로 덮인 흙길의 부드러운 감촉을 즐기면서 걷노라면 낯선 등산객들의 나지막한 숨소리도 정겹게 들린다. 

 

능전마을 주차장에서 차도를 따라 걷다가 전나무와 소나무 사이의 오솔길을 따라 30여 분 올라가면 본격적인 등산이 시작되는 발구덕이 나온다. 평소에는 차량이 이곳까지 올라오지만 축제기간에는 차량 출입을 통제하기 때문에 여기까지 걸어서 와야 된다. 산간마을인 발구덕은 카르스트 지형으로 지반이 여기저기 움푹 파인 독특한 형태를 지녔다. 대표적인 돌리네 지형인데 여기저기 푹 꺼진 구덩이는 모두 8개로, '팔구덩'이라 부르던 이름이 언젠가부터 슬며시 '발구덕'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해발 800m에 있는 산간마을 이름도 발구덕 마을로 불린다.

 

정상 아래에 있는 지반이 움푹 파인 돌리네 지형

 

발구덕 마을에서 민둥산 정상까지 약 1km 거리인데 모두 매점 앞 의자에 앉아 잠시 쉬어 간다. 고개를 들어 산 위를 바라보니 민둥산 8부 능선에 터를 잡은 억새들이 온몸을 흔들면서 어서 오라고 등산객들을 반긴다. 사람보다 키가 큰 데다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억새 사이로 한두 사람 정도 지나갈 수 있을 만큼 다져진 좁은 오솔길은 마치 곱게 가르마를 타 놓은 것 같다. 가을바람에 춤을 추고 울어대는 억새는 더없이 낭만적이다. 

 

산정의 가을바람을 잘게 부수는 가녀린 억새

 

산에 살면 억새고 물에 살면 갈대다. 억새와 갈대는 자칫 비슷해 보이지만 억새는 은빛이나 흰색이며, 갈대는 고동색을 띠는 색깔이다. 그리고 갈대의 키가 더 큰 것이 특징이다. 대평원의 억새풀은 솜털 같은 꽃을 몸에 싣고 가녀린 몸뚱이만 흔들리며 빗살처럼 바람을 잘게 부수고 있다. 오늘따라 능선에 부는 바람은 그 위세가 대단하다. 야성이 넘치는 가을바람은 쉴 새 없이 얼굴을 때린다. 가을 산 억새가 처절한 생존 본능으로 냉혹한 자연에 꿋꿋하게 버텨내는 모습을 보니 숙연해질 뿐이다. 

 

 민둥산 정상(1,118m)에 선 가을 산객들

 

민둥산 정상에 서니 바람과 구름과 억새가 연출하는 환상의 하모니가 들린다. 정상에서부터 둥그스름한 산 능선을 타고 끝없이 펼쳐진 억새밭은 투명한 가을 햇살을 받아 산 전체가 은빛 물결에 휩싸인다. 해가 질 무렵 하얀 억새가 불그스름한 노을빛을 받아 빚어내는 금빛 물결은 한편으로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파란 하늘 아래 펼쳐진 천상의 파노라마에 절로 탄성이 나온다. 평원의 억새는 가녀린 제 몸을 휘청거리면서 세상 풍파에 찌든 우리 영혼을 어루만져준다. 

 

 정상의 전망대에 서면 장엄한 백두대간을 조망할 수 있다.

 

정상에 올라서서 사위를 둘러보면 부챗살처럼 펼쳐진 주변 고봉준령의 수려한 산세와 화방재에서 함백산을 지나 피재에 이르는 백두대간 분수령의 웅장함과 장쾌함을 맛볼 수 있다. 정상의 전망대에 서면 높이 솟은 백두대간 위로 낮게 깔린 하늘이 더욱 가깝게 느껴진다. 동으로 대덕산, 매봉산, 금대봉, 은대봉, 백운산, 함백산, 태백산의 산그리메가 끝없이 펼쳐진다. 능선은 지억산으로 이어지고, 그 뒤로 두타산과 청옥산이 보인다. 

 

 억새평원 아래로 증산리와 증산역, 그 너머로 강원랜드와 하이원 리조트가 보인다.

 

등로에 쌓인 낙우송 이파리를 밟으면 '사각사각' 하고 내는 소리가 운치가 있고 정겹게 들린다. 급경사 길이다 보니 무릎이 다소 부담스럽기는 하다. 다람쥐가 나무 등걸 구멍 속에서 머리를 내놓는 모습을 눈에 담고, 갈잎이 바람에 휘날리는 소리, 낙우송이 떨어지면서 내는 싸락눈 같은 소리도 귀에 담으면서 비어가는 가을산을 내려온다. 빈 산에 해 떨어지니 억새는 이제 주황빛을 발하고 민둥산 자락을 드리우기 시작하는 산 그림자가 아득해서 민둥산 억새는 벌써 그리움 되어 다가온다.

 

 

[여계봉 선임기자]

수필가

공학박사

이메일 : yeogb@naver.com

작성 2025.10.29 10:30 수정 2025.10.29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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